오늘날의 교회 상황에서 전도하고자 할 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교회들의 대부분 전도 활동은 예배당 현관을 들어오는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일명 '현관 전도(front-door evangelism)'라 부르고 싶다.
현관 전도의 방법
현관 전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현장으로 나가서 그들을 만나기보다는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을 강조한다. 그 결과 현관에 영접하는 사람들을 세움으로써, 편지나 엽서를 보냄으로써, 의식(결혼식 혹은 장례식 등)에 초대함으로써, 또는 특별한 전도 집회를 통하여서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등록시키는 데 전도 노력을 집중한다. 이러한 '와 보라'는 식의 전도 자세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대개의 불신자들이 결혼식이나 장례식과 같은 특별한 행사 때 외에는 예배당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록 우리가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예배 모임이나 주일 학교와 같은 대그룹 모임은 그 본질상 비인격적이다. 대그룹은 친밀한 교제와 관심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하지 못한다.
현관 전도가 가끔은 성공을 한다고 할지라도 최근의 교회 성장 연구에 의하면 예배당 현관을 들어오는 대부분의 불신자들은 기존 교인들과 관계를 거의 맺고 있지 않음이 밝혀졌다. 의미 있는 관계란 그렇게 쉽게 발전하지 않기 때문에 이 불신자들 중 대다수는 뒷문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른바 이 '회전문 신드롬'이 많은 지역 교회를 괴롭히고 있다. 목회자로서 나도 그러한 실패를 맛보았다.
대그룹 모임들이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신자들(insiders)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방문자나 겉도는 신자들(out-siders)은 소그룹 환경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진실되고 애정 어린 성경적인 관계에 의해 감동받지 못하고 흔히 소외되고 만다.
우리 중에 많은 이들이 예배당 현관 안으로 불신자를 데려오기만 하면 자기 할 일을 다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고는 그를 좀더 전문적이고 유능한 사람의 손에 맡겨 버린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불신자를 교회로 데려을 때보다는 차라리 환자를 병원 응급실에 입원시킬 때에 더 적합하다. 일단 응급실에 들어가서 환자들의 이름으로 등록 카드를 가득 채운 다음 그들을 전문의나 간호원의 손에 맡기고 떠날 수 있다. 웅급 상황을 처리할 훈련을 받고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로 환자들을 데려다 줌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역할을 신실하게 잘 완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곳을 떠난다.
그러나 이런 전략이 전도에 사용될 때 그것은 전혀 쓸모가 없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기독교는 의사가 처방전을 다루듯이 특정인들에게만 말려진 어떤 것이 아니다. 교회 성장 연구는 안면이 없는 전도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나온 사람들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이 지역 교회 안에서 결코 성장하지 못하며 또 신실한 교인이 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적절한 장소
불신자가 처음 교회에 왔을 때 목회자나 대다수의 신자들이 그에게는 낯설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특별한 장소로 데려가신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다. 즉 그들의 집에서, 우물가에 앉으셔서, 산기슭에서, 심지어는 격심한 폭풍우 가운데 있는 배 위에서 말씀을 전하셨다.
우리는 전통적인 프로그램과 현관 전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복음 전도는 전문가들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니다. 전도는 예배당으로 불신자를 데려오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다. 전도란 또한 일련의 기간 동안 정해진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미리 준비된 형식이나 방법 이상이다.
빅터의 가상적인 이야기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늘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는지 분석해 본다면, 대부분의 신자는 주로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신뢰하는 친지나 친구 또는 어떤 사람을 통하여 주께로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빅터의 경우에는 친구 단을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빅터가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열성은 홀륭했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 그는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을 전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집에서는 혼란만 남겨 놓았다. 빅터는 분명히 자기 아들이 혹 사이비 종파에나 빠지지 않았나 염려하시는 아버지를 더욱 혼란케 했으며, 자기 누이로 하여금 그녀의 개인적인 필요보다도 전도 내용을 암송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인상을 받게 하였다.
많은 신자들이 영적인 우선순위를 잘못 세우고 있다. 누가복음 10장 38절부터 40절까지에 나오는 마르다처럼 우리의 열심히 때로 진지하긴 하지만 잘못되어 있다. 오히려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과 교제하며 다른 사람들을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복음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만 한다. 구원을 베푸시는 복음의 능력은 비인격적인 복음 제시를 통하여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을 통하여서 전해진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하심 안에서 시간을 보냄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빚으시도록 맡길 때, 주님의 역사로 우리의 삶은 변화될 것이다.
복음 전도자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흔히 좋은 의식과 훈련을 구비한 교회의 건물이나 조직이 떠오른다. 그러나 참된 진리는 나와 당신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신약 성경이 교회에 관하여 언급할 때 그것은 물리적인 건축물이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에 관하여서 말한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 교회에 관하여 언급했을 때 그는 언덕 위에 세워진 호화스러운 건물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에베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곧 에베소에 있는 교회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바로 교회이다. 게다가 교회인 우리는 또한 복음의 전도자들이다. 전도자(minister)란 단어의 성경적인 의미상 자기가 신학 학위를 소지하고 있고 또 교회에서 공식적인 지위와 직함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복음 전도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란 점에 비추어 볼 때 교회 안에서 만들어진 어떤 구분은 인위적이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 모두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벤전 2:5)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롬 8:17)라고 일깨워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된다. 교회의 유급 사역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전담시키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태도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볼 때 바르다고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교회에 어떤 직분자들 곧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를 주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하라고 교회에 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능동적인 봉사자들이 되게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세우셨다고 바울은 말했다(엡 4:11~12).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또 구원을 받아야 할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이 전혀 활동적인 복음 전도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우리가 때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시도하나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아니라 언제나 예외적인 일에 불과하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당신은 용기를 내어 정규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완수해야 할 당신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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